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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회소개
인천항의 발자취
Ⅰ.인천(仁川)의 명칭과 명칭의 변천과정
이 지역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 장수왕 때 (475)로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때 한자식으로 바뀌어 소성현(召城縣)이 되었다. 고려 숙종(1095~1105) 때 숙종 어머니의 내향(內鄕)이었던 관계로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승격되었다. 그 뒤 인종(1122~1146)때에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승격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몰락하다시피 하였으나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다시 경원부로 환원되었다. 그것은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동안 고려왕실과 관련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가 개국되면서 경원부는 다시 인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태종 13년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의 군·현 명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하여 현재의 인천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그날 (1413년 10월 15일)을 기려 ‘인천시민의 날’ 이 제정되었다.
| 순위 | 명칭 | 시대별 |
|---|---|---|
| 1 | 彌鄒忽(미추홀) | 백제초기 비류의 도읍비 |
| 2 | 買召忽(매소홀) | 고구려 장수왕(475) |
| 3 | 卲城懸(소송현) | 신라 경덕왕 16년(757) |
| 4 | 慶源郡(경원군) | 고려 숙종(1095) |
| 5 | 仁 州(인 주) | 고려 인종 11년(1133) |
| 6 | 慶源府(경원부) | 고려 공양왕 2년(1390) |
| 7 | 仁 州(인 주) | 조선 태종 원년(1392) |
| 8 | 仁川郡(인천군) | 태종 13년(1416.10.15.) |
| 9 | 仁川都護府(인천도호부) | 세조 6년(1460) |
| 10 | 仁川府(인천부) | 고종 32년(1895) |
| 11 | 京畿道仁川府(경기도인천부) | 건양원년(1896) |
| 12 | 仁川府(인천부) | 1910.10.01. |
| 13 | 仁川市(인천시) | 1949.08.15. |
| 14 | 仁川直轄市 | 1981.07.01. |
| 15 | 仁川廣域市 | 1995.01.01. |
〔출처〕 1. 인천광역시청(http://www.incheon.go.kr)
2. 인천세관 120년사(인천본부세관, 2003)
Ⅱ.인천항(仁川港)의 개항 및 인천해관의 개청
인천의 개항은 고종 20년 (1883) 1월 1일에 이루어졌으며 그 근거는 고종 13년(1876) 2월 26일 강화성 서문 밖 연무당에서 일본의 협박과 강요에 의하여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에 근거한 것이다. 이 조약은 일본의 일방적인 강요에 쳬결된 국가의 주권이 무시당한 치욕적인 조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후 계속하여 구미제국과의 조약에서도 기준이 되었고 특히 치외법권을 용인하여 결과적으로 조계제도(組界制度)를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수호조약에 의하여 개항한 3개 항구 중 부산은 1877년 1월 30일에 개항되었으나 경기·충청·전라·경상·함경 등 5도 중 연해에서의 2개 항구는 따로 선택하여 후보지를 지정하되 1876년 2월부터 기산하여 20개월(1876년 10월)이내에 개항하도록 약정되어 있어서 동해안에서 선정된 원산항은 1880년 5월에 개항되었으나 서해안에서 선정된 인천항은 1883년 1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개항되었다. 이와같이 인천의 개항이 조약상의 기한보다 83개월이나 지연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일본이 운양호사건을 조작하여 강압적으로 체결한 한·일병자수호조약 중에는 3개항을 제외한 2개소의 개항 후보지는 명시되지 않았었고 ② 개항을 요구한 일본측도 동해안(원산) 및 서해안(인천)의 각 1개의 항구에 대한 후보지 선정에 있어 사전조사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③ 특히 인천항의 경우 수도 서울과 너무 가까워서 국가안보로 인한 한국조야의 격렬한 반대여론이 많았으며 ④ 일본은 조약 조인 후 5년여에 걸쳐서 계속적인 탐사작업을 하는 등 집요한 교섭을 통하여 1881년 2월에 이르러 인천항은 미곡을 운반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882년 9월까지 개항하기로 합의하였으나 1882년 5월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한·영 및 한·독조약의 체결 등 갑작스러운 구미 각국과의 통상조약 체결로 인하여 인천의 개항은 미묘한 국제성을 띄게 되었으며 ⑤ 1882년 7월 23일 발생한 주안 일본공사관이 소각되고 공사관원 13명이 살해되는 등의 사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항이 1883년 1월1일 개항하였으나 1월 1일은 개항을 포고한 것에 불과하고 사실상 개항장 업무를 시작한 것은 같은 해 6월로서 도변승미(渡邊勝美)는 그의 조선개항외교사연구(朝鮮開港外交史硏究)에서 인천이 6월 16일에 외국무역을 위하여 개항하였다고 하였고 인천부사(仁川府史)에도 인천이 실질적으로 개항된 것은 6월경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인천에 일본인이 최초로 도래한 것은 4월 13일이었던 것으로 보아도 6월 개항은 신빙성이 있어 보여진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1883년 6월 16일은 인천해관이 두모진해관에 이어 인천해관(仁川海關)으로 개청한 날이기도 하다. 개항후 새로운 국제관계에 수반하여 외교사절의 상호교환과 주재 외국인 거주지 설정, 외국상인들의 출입, 선박의 입·출항 및 국제교역 등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하여 조선 정부는 개항장의 통관사무를 전문적으로 처리할 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 기관을 감리서(監理署)라 하였고 인천감리서는 고종 20년(1883) 8월19일 설치되었다. 이날 개항장의 통상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行護軍 趙秉稷(행정보호군 조병직)을 감리인천통상사무로 임명하였다.
일찍이 당시 조선은 일본을 롤모델로 삼아 세관제도를 연구하였으나 여의치 않았고, 결국 청나라의 관세행정조직인 해관을 모델로 조선해관을 창설하기로 한다. 그리고 청나라의 권고를 받아들여 청국해관 경력의 통역관인 독일 출신의 묄렌도르프를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협판(지금의 차관급)으로 임명한다. 당시 묄렌도르프는 청나라에서 해관원, 엔지이너, 경찰 등 가운데 필요한 인원 20여명을 선발하여 이들 중 제1진이 1883년 6월 16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조선 최초의 근대식 세관인 ‘인천해관’을 창설하게 된다. 이는 현재의 인천본부세관의 전신으로 이러한 인천해관의 창설일은 현재 인천세관의 개청일로 기념하고 있다. 인천해관의 청사가 언제 어떻게 마련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1883년 제작된 ‘제물포 스케치’를 통해 그 위치를 짐작하고 있을 뿐이고 현재에는 ‘제물량로 257-1’로 추정하고 있으며 최근까지도 운영했던 오래된 관광호텔 자리로 추정된다. 인천해관이란 이름으로 인천세관이 처음 업무를 시작한 때는 1883년 6월 16일이고 당시 인천해관의 관할구역은 경기, 충청, 전라, 황해, 평안의 5도에 이르렀다. 개항기 세관의 업무는 단순히 관세부과와 밀수단속에 그치지 않았다. 항만수축, 개항지관리, 토지경매, 왕실자금관리 부터 한강수로 답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행정을 집행한 근대적 행정기관이자 작은 정부였던 것이다. 인천세관은 1980년 인천본부세관으로 승격하였으며, 아암물류2단지인 송도동 297-14,15,10으로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
〔출처〕 1. 인천광역시청(http://www.incheon.go.kr)
2. 인천세관 120년사(인천본부세관, 2003)
Ⅲ.인천(仁川)의 시대별 역사탐방
인천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동틀 무렵, 이미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지역 곳곳에서 구석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사회적 문화적 유산은 신석기·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날로 새롭게 축적·확장되어 기원 전 1세기 경에는‘미추홀(彌鄒忽)’을 건설하였다. 한강 중류에서 백제가 세력을 떨치고, 고구려의 평양 천도 이후 이루어진 남진정책으로 인천은 점차 그 독자적 세력을 잃어 갔으며, 이들 두 세력의 신장에 밀려 더 이상 서해안지역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끝내 백제의 평범한 군·현으로, 이어서 고구려의 군·현으로 편입되었다. 백제의 지배 하에서 인천은 대외교통의 창구가 되었는데, 고구려와는 달리 해상으로 중국과 교통할 수 밖에 없었던 백제가 그 수도를 충청도 공주로 옮길 때까지 100여 년 동안 능허대(凌虛臺 : 연수구 옥련동)를 항구로 하여 중국과의 교통을 취한 것이었다. 이후 대동강과 원산만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그 영토를 넓힌 신라는 중국과의 해상교통의 거점을 당항성으로 하였다. 그리고 인천에는 군진[軍鎭 :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여 외침의 방어와 함께 해상교통의 안전을 기하는 군사기지로 삼았다. 인천이 이번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부상되는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인천의 해상교통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은 고려왕조가 개성에 도읍하면서 더욱 확대·촉진되었으며, 일찍이 해로를 통한 대외무역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였던 고려 왕실은 개성에 이르는 수로(예성강) 입구에 위치한 강화·교동·자연도 등을 중심으로 대외교통의 거점을 개발·정비하는 한편, 이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부평[수주(樹州)]에 수도 개성의 남방지역을 방어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였고, 안남도호부에는 원인천[소성현(邵城縣)]과 시흥·양천·통진· 김포 등이 예속되어 있었으며, 이제 인천이 ‘꼬레아’로 서방세계에 알려지는 고려의 국제교류의 관문으로 정립된 것이다. 인천은 이후 고려왕조 일대에 걸쳐 날로 번성하여 갔으며, 먼저 인주 이씨의 왕실과의 혼인으로 경원군(慶源郡; 숙종 때)이 되고, 이어 다시 인주(仁州 : 인종 때)로 그 위상을 높여갔으며, 고려 말에는 ‘칠대 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 : 1390)로까지 격상되었다. 그리고 부평도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에서 길주목(吉州牧 :1308)으로 승격되었다가 부평부(富平府 :1310)로 고쳐졌고, 강화는 몽골(蒙古)의 침입 이후 40년 가까이 피난수도 [강도(江都)]로 자리하면서 대몽항쟁의 중심을 이루어 그 위상이 극에 달하였다. 고려가 몽골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또 조선왕조가 개국되면서(1392) 강화도에 이룩하였던 모든 문물·시설과 인천지역 경원부의 위용이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고 말았지만, 고려 500년 동안의 인천은 명실공히 수도 개성에 다음가는 번화했던 지역이었다.
고려왕조에 이은 조선은 유교지치주의(儒敎至治主義)를 내걸고 대내적으로는 자급자족적인 토지경제와 유교적인 교화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명나라와 같이 해금책(海禁策)으로서 쇄국정책을 폈다. 따라서 황해의 해상교통이 전면 금지되었음은 물론, 내·외국인의 왕래가 극도로 규제되었고,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경원부의 지난 날 이름인 인주(仁州)에서 군·현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을 모두 산(山)이나 천(川)으로 고치는 행정구역 개편 원칙에 따라 ‘인(仁)’자와,‘천(川)’자가 합해져서 ‘인천(仁川)’이라는 행정구역 명이 비로소 나오게 되었다. 이후 200여 년 동안 인천은 자급자족적인 한적한 농·어촌사회로 존속하였다. 그러다가 1600년을 전후로 왜란과 호란을 연달아 겪으면서 인천은 다시 한번 국방상 요충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일본의 침입을 받을 경우에는 남한산성을 보장처(保障處 : 왕실과 조정이 잠시 피난하면서 전란을 극복하는 곳)로 하고, 대륙세력의 침입을 받을 경우에는 강화도를 보장처로 한다는 전략이 수립되면서 남한산성의 경영과 함께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인천 해안지역의 방어체제와 시설이 새롭게 보강되었다. 이리하여 1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인천이 강화를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육·해군의 기지로 변모하면서 왕실의 보장처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미 중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조선에도 통상을 요구해 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들 군사시설은 보장처의 수호보다는 서양세력의 진입을 저지, 차단하는 최전방 방어시설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양세력들이 서해안지역, 그중에서도 수도 한양(漢陽)에 이르는 입구[이른바 인후지지(咽喉之地)]인 인천 해안으로 밀려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진출하려는 서양세력의 끈질긴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의 해금책은 끝내 인천해안에서 군사적 충돌, 이른바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일으켰다. 전쟁의 주무대가 된 강화도는 몽골의 침입 때보다 크나 큰 상처를 입었지만, 500여 년 만에 다시 한번 조국수호의 성지로 부각되었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물리친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으나 일본의 강압과 국내 정세의 변화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修規 :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1876). 수백 년동안 지속되어 오던 일본과의 교린정책이 무너지자, 중국(청나라)은 조선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서둘러 미국을 비롯한 구미 열강들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주선하였으며, 중국과 일본의 문호개방으로 이른바 은둔국이라 불렸던 조선도 그 문호를 세계에 개방하게 된 것으로서 원인천은 바로 이 같은 역사의 현장이 되었으며 문호개방의 최전방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정부도 이들의 조선 진출을 가능한 한 개항장에 국한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에 제물포에는 인천해관(1883)과 인천감리서(1883)가 설치되었고, 각국 영사관과 전관조계(專管租界 : 일본 1883, 중국 1884) 및 공동조계(共同租界 : 1884,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외국인 거주 지역)가 설정되었으며 , 이들을 중심으로 각국의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들도 설립되었으며, 황해를 통한 외국과의 해상교통이 폐쇄된 지 500년 만에 다시 인천이 국제적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으며 ‘인천의 개항’을 제물포 개항으로부터 기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물포 개항은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으나,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서의 일본의 승리로 한국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우선 제물포와 한성(漢城)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를 부설하고(1899) 이들과 연계되는 항만의 확장·수축에 착수하였으며(1906). 일본의 식량(쌀)과 공업원료 (주로 목면)를 확보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 그리고 수리조합 설립(부평수리조합 :1923) 등을 추진하였다.
일본의 식민지경영이 강화되고 대륙침략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공단과 거주지를 건설하고, 김포·부평평야를 절대농지로 하여 식량공급지로 삼았고, 인천부는 1910년의 부역, 곧 옛 인천도호부의 부역에다가 부평군의 일부까지 차지하는 넓은 부역을 갖게 되었다. 개항 직후 제물포 중심의 작은 항구도시·상업도시였던 원인천사회가 거대한 항만도시이자 커다란 중공업단지와 농업단지를 배후에 두는 산업도시로 그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천은 철저히 일본화되면서 일본인 중심의 도시와 농·공단지로 변하여 갔으며 일본인의 억압과 수탈도 지속적으로 강행되어서 한국인의 저항도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개항 직후 개항장에서의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마찰·갈등은 극히 개별적이고 간헐적이었다. 비록 일본의 강압으로 개항되기는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도 18세기부터 사회개혁을 모색·추구하는 기운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외래문물이나 시세의 변화에 대한 일방적인 거부감보다는 적절히 적응하고 수용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1897년에 설립된 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는 그 하나의 좋은 사례로서 제물포 개항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객주들의 조합인 인천객주회(仁川客主會 : 1885)를 모체로 사회 유지들이 함께하여 설립한 이 협회는 일본 기업과 상인에 대응하여 우리 민족상인의 상권을 옹호·신장하면서 새로운 상업질서를 정립하고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광복 후 한동안 우리나라는 나라 이름마저 각양각이하게 부를 정도로 다양한 성향의 정치세력들이 난립하여 혼란을 거듭하였다. 미군이 가장 일찍 진주하였다는(9월 8일) 인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8.8.15)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경제를 지향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인천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으며 미군정 때 잠시 제물포시(1945.10.27)로 바뀌었던 인천부도 1949년 지방 자치법에 따라 경기도 인천시로 정립되었고(1949.8.15), 시의회도 구성되었으며(1952년) 시장 또한 간선(間選)으로 선출되었다(1952년). 인천의 본격적인 성장은 1960·7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거듭 추진되면서 이루어졌다. 원인천의 임해공단들과 부평공단(경인공단)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수출 위주로 전개되면서 이를 위한 각종 기간(基幹)시설의 확충과 편의시설의 확대가 우선적으로 마련되었다. 인천광역시는 지금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로 세계를 향해 웅비하고 있다. 서울의 관문으로서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거대한 관문이자 국제적 물류중심지, 산업·정보단지·관광·휴양단지로 비약적인 성장을 기하고 있는 것이며, 한·중수교로 인한 대중국 전초기지로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지난 날의 인천(원인천)과는 완연히 다른 새로운 차원의 국제도시로 변화하고 있다.
〔출처〕 1. 인천광역시청(http://www.incheon.go.kr)
2. 인천세관 120년사(인천본부세관, 2003)
Ⅳ.한·중 수교와 인천항 국제여객선 항로의 개설
1989년 12월 미·소 몰타 정상회의에서 냉전종식을 선언하였다. 1989년 5월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 이후 1990년 9월 한·소 수교가 수립되었으며 중국 인민공화국의 건설과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양국 간의 교류를 새롭게 개시하고자 하는 한·중 양국의 필요에 따라 한·중간에 국교정상화 노력이 시작되었으며 한·중수교 이전인 1990년 9월 15에는 인천-위해의 국제여객선 항로가 개설되었고,1991년 12월 24일에는 인천-천진의 국제여객선 항로가 개설되었다. 한·중 수교 2년전이 1990년에 인천-위해 항로가 처음 개설된 이후 인천-중국 간에 10개 항로, 평택-중국 간에 5개 항로, 군산-중국 간에 1개 항로가 개설되었다.
인천항은 산업항인 북항과 무역항인 내항, 남항, 신항이 있으며, 연안부두와 신남항의 국제여객부두 및 크루즈터미널이 있다. 인천항으로 선박이 입출항하기 위해서는 인천항의 항로를 따라 항해하여야 한다. 입항을 기준으로 팔미도를 좌측에 두고 인천항(남항, 북항 등)으로 들어오는 항로를 제1항로(이전의 동수도)라 한다. 내항으로서의 접근수로를 제2항로, 신항으로의 접근수로를 제3항로, 팔미도 남측에서 제1항로와 제3항로를 연결하는 수로를 제4항로라 한다. 출항을 기준으로 인천대교 밑에서 무의도 남측으로 나가는 항로를 연안여객선항로(이전의 서수도)라 한다. 이전에는 팔미도를 기준으로 동측항로인 동수도로 입항하여 서측항로인 서수도롤 출항하였으나 연안여객선과 상선의 입출항항로가 중첩되지 않도록 통항대를 분리하여 항로를 설정하여 통항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인천항에 출입하는 선박이 바닷길을 확인하기 위하여 바다 위에 등부표를 설치하였으며, 입항을 기준으로 항로의 오른쪽 선에는 홍색 등부표를 설치하였고 왼쪽 선에는 녹색 등부표를 설치해 두고 있다. 그리하여 입항하는 선박은 오른쪽에 홍색 등부표와 왼쪽에 녹색 등부표를 두고 그 사이를 따라 항해하면 되고 출항하는 선박은 오른쪽에 녹색 등부표와 왼쪽에 홍색 등부표를 사이에 두고 그 사이를 따라 항해하여야 한다.

2006년 3월 28일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이 인천항을 통하여 첫 수줄을 시작하였으며, 인천 내항4부두에서 출항식을 거행하였다. 2012년 3월 기준 개성공단에는 섬유(72), 화학(9), 기계금속(23), 전기전자(13), 식품(2), 종이목재(3), 비금속광물(1) 등 모두 123개 업체가 가동 중이었다. 그러나 2016년 2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일 발사 등으로 인행 개성공단의 가동이 중단되면서 인천항을 이용한 수출도 중단되게 되었다.
남북합의서 체결 이후 국양해운의 트레이드포츈호가 취항 하는 등상업항로 개설이 활성화되는 것 같았으나, 남북 직항 상업항로는 남북의 정치여건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으며, 4,500톤급 트레이드포츈호는 2002년 이후 주1회 인천-남포 정기항로에 취항하면서 남북교역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2010년 천안함 사건 여파로 남북교역을 중단하는 5·24조치가 발표된 이후 트레이드포츈호는 북한을 오가는 횟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게 되었고 북으로 보낼 화물이 줄어들면서 트레이드포츈호는 2011년에는 겨우 5차례만 운항하였고 2012년에는 단 1차례도 남포항에 가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산으로 위장·반입하기 위하여 원산지증명서 발급기관인 ‘조선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에서 발급한 원산지증명서 등을 확인하기 위한 원산지규정을 제정·시행하였다.
〔출처〕 1. 인천광역시청(http://www.incheon.go.kr)
2. 인천세관 120년사(인천본부세관, 2003)
Ⅴ.내항과 신항에서의 세관의 역할 증대
1974년 5월 10일에 인천내항도크가 준공되었다. 이 항만시설은 국제적 차원에서 계획되어 추진된 것으로서 동양 최대의 것으로 공인되었으며, 1966년 3월에 착공된 후 8년만에 완성된 것이다. 인천 내항의 도크화에 따라 연안부두가 새로 건설되고 연안부두 일대의 매립지가 새로운 시가지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1부두는 공영으로 운영되었고, 2부두는 철재물품, 3부두는 잡화물품, 4부두는 자동차·사료, 5부두는 자동차, 6부두는 철재·자동차, 7부두는 양곡·잡화, 8부두는 공영물품을 하역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 구분 | 계 | 부두 | ||||||||
|---|---|---|---|---|---|---|---|---|---|---|
| 1 | 2 | 3 | 4 | 5 | 6 | 7 | 8 | |||
| 접안 능력 |
선석수(5만톤) | 43(12) | 10(1) | 7 | 7 | 5(1) | 4(4) | 4(1) | 4(4) | 2(1) |
| DWT(천톤) | 2~50 | 2~50 | 8~30 | 8~20 | 10~50 | 50 | 5~50 | 50 | 20~50 | |
| 상옥 | 동수 | 21 | 3 | 10 | 4 | 3 | 1 | - | - | - |
| 면적(천㎡) | 202 | 12 | 53 | 20 | 112 | 5 | - | - | - | |
| 야적장 면적(천㎡) | 864 | 132 | 72 | 59 | 243 | 174 | 110 | - | 73 | |
| 부두길이(m) | 9,405 | 1,799 | 1,278 | 1,250 | 1,160 | 1,150 | 950 | 1,216 | 602 | |
| 하역능력(천톤) | 31,671 | - | 5,380 | 4,340 | 3,861 | 8,530 | 3,040 | 6,520 | - | |

한·중 훼리호는 그동안 제1국제여객터미널과 제2국제터미널로 나누어서 입항하였으나, 신항부두의 증설로 인하여 세관의 밀수단속 및 여행자의 휴대품통관업무 등은 종합적인 시스템을 통하여 진행하고 있으며, 인천항을 통한 한중훼리호는 10개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 항로명 | 선사명 | 선명 | 취항일 | 마일 | 운항시간 | 운항횟수 |
|---|---|---|---|---|---|---|
| 인천/연운항 | 연운항훼리 | 하모니 윈강 | 17.12 | 396 | 23 | 주2회 |
| 인천/단동 | 단동항운 | *단동항 개조공사 등으로 22.09이후 운항중단 중 | ||||
| 인천/대련 | 대인훼리 | 비룡호 | 15.05 | 285 | 16 | 주3회 |
| 인천/천진 | 진천항운 | *선령경과로 서비스중단, 신조선 건조 후 재개 예정 | ||||
| 인천/청도 | 위동항운 | 뉴골든브릿지Ⅴ | 04.01 | 338 | 16.5 | 주3회 |
| 인천/위해 | 위동항운 | 뉴골든브릿지Ⅶ | 18.09 | 236 | 12 | |
| 인천/석도 | 화동해운 | 화동명주Ⅷ호 | 16.10 | 220 | 12 | |
| 인천/연태 | 한중훼리 | 신향설란호 | 21.01 | 313 | 14 | |
| 인천/진황도 | 진인해운 | 신욱금향호 | 04.04 | 405 | 23 | 주2회 |
| 인천/영구 | 범영훼리 | 자정향호 | 03.01 | 435 | 26 | |

국제여객선석배정에 대하여는 1선석에는 연운항훼리호가, 2선석에는 단동항운훼리호와 대인호훼리호가, 제3선석에는 진천항운훼리호와 위동항운훼리호가 , 제4선석에는 위동항운훼리호가, 제5선석에는 화동해운훼리호와 한중훼리호가, 제6선석에는 진인해운훼리호와 범영훼리호가, 제7선석에는 프루즈선이 정박하도록 선석이 지정되어 있으며, 제6선석과 제7선석은 카리호와 크루즈선이 겸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출처〕 1. 인천광역시청(http://www.incheon.go.kr)
2. 인천세관 120년사(인천본부세관, 2003)
3. 인천항만공사(www.icpa.or.kr/)
ⅤI. 홈페이지 개설 및 홈페이지 운영규정 제정
❑ 한국관세사회, 서울지방관세사회, 부산지방관세사회, 인천공항관세사회는 자체 홈페이지를 통하여 소속 회원에게 수출·입통관업무수행에 필요한 각종 법령 및 관세청장(세관장)의 시달공문 등의 내용을 제공하여 신속하고 정확한 관세사업무 등을 수행토록 하였다.
❑ 그러나, 인천지방관세사회는 자체 홈페이지를 보유하지 않고 있어서 각종 자료 등을 제공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회원이 납부하여야 할 회비 등에 대한 고지내용 및 회비납부사실에 대하여도 확인할 수 있는 회비영수증출력시스템이 준비되어 있지 않음으로 인하여 전산시스템을 이용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초래하였다.
❑ 그리하여, 회비영수증출력시스템이 포함된 인천지방관세사회 홈페이지 제작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 관세업무 및 전산업무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제28대 인천지방관세사회 회장단(회장 :조규생)을 중심으로 T/F팀을 구성하였다
| 인천지방관세사회 | 성명 | 관세사무소명 |
|---|---|---|
| 회장 | 조 규 생 | 해인관세사무소 |
| 부회장 | 이 동 우 | SL관세사무소 |
| 고문 | 김 성 남 | 인천관세법인 |
| 운영위원 | 신 승 우 | 원스탑관세법인 |
| NCOM(수출입통관) | 김 상 길 | 전산개발부장 |
❑ 홈페이지가 영수증출력시스템과 연계하여 작동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고, 관세청·한국관세사회·인천본부세관의 홈페이지를 인천지방관세사회 홈페이지에서 검색이 가능하도록 설계하였다.
❍ 제28대 인천지방관세사회장 임기(2025.04.01.-2027.03.31.) 개시일 2일 후인 2025.04.03일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등 6개월동안 9회에 걸쳐서 여러 가지 사항을 검토·분석하여 2025.10.1.일자로 개통하였다
| 일 시 | 내 용 | 장 소 |
|---|---|---|
| 2025.04.03 | 기본계획수립·방향설정 | 인천지방관세사회 |
| 2025.05.08. | 서울·부산·인천공항 홈페이지 분석 | 해인관세사무소 |
| 2025.05.27. | 인천지회 홈페이지 메뉴 분석 | 인천지방관세사회 |
| 2025.07.15 | 메뉴설정의 타당성 검토 | 인천지방관세사회 |
| 2025.07.22 | 홈페이지 사항 검토 | 원스탑관세법인 |
| 2025.07.23 | 회비영수증출력시스템 검토 | 인천지방관세사회 |
| 2025.09.01. | 표지 내용 등 종합점검 | 원스탑관세법인 |
| 2025.09.26. | 최종점검(T/F팀) | 인천지방관세사회 |
| 2025.09.29. | 시뮬레이션(운영위원) | 인천지방관세사회 |
❑ 홈페이지는 표지내용과 본문내용으로 구분하여 작성하였으며, 회원과 비회원이 열람할 수 있는 범위를 구분하였다.
❍ 표지내용에서는 인천지방관세사회의 영문명칭을 ‘Incheon Certified Customs Attoneys Association(INCCAA) 설명하고 있으며, 관세청·한국관세사회·인천본부세관의 홈페이지를 링크하여 검색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 또한, 인천지방관세사회의 영문명칭을 인천지방관세사회 회칙에 반영하였으며, 인천지방관세사회의 홈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를 새롭게 개정하였다.
| 구분 | 변경 전(前) | 변경 후(後) |
|---|---|---|
| 명 칭 | 한국관세사회 인천지부 | 인천지방관세사회 (Incheon Certified Customs Attoneys Association: INCCAA)로 영문명칭 제정 (회칙 제1조로 규정) |
| 홈페이지 | https://inccaa.or.kr | |
| incheonjibu@daum.net | inc@inccaa.or.kr |
❍ 회원전용 메뉴에서는 인천지회 회칙 등 각종 각종 규정, 회원공지사항(공문 시달내용), 회원전용게시판, 월간계획, 지회회비청구현황, 지회회비납부현황, 각종 신청(신고)서로 구분하여 설명하도록 하였다.
❍ 관세사 제도메뉴는 관세사 등록절차, 인천지회 관세사현황을 설명하도록 하고 있고, 소식터 메뉴는 경조사, 인천항 소식으로 설명하도록 하고 있으며, 구인·구직사항으로 설명하도록 하고 있다
❍ 관리자 전용메뉴는 수입(회비 등) 결의서, 지출결의서, 팝업관리(지회청구현황 등 납부기한 명시)로 구분하여 설명하도록 하였다.
❑ 홈페이지(회비영수증출력시스템 포함)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홈페이지 운영규정을 제정하였다.
| 조문별 | 내 용 | 조문별 | 내 용 |
|---|---|---|---|
| 제1조 | 목적 | 제2조 | 용어의 정의 |
| 제3조 | 구성 | 제4조 | 관리책임자의 지정 |
| 제5조 | 관리책임자의 의무 | 제6조 | 회원의 가입 |
| 제7조 | 회원의 권리 | 제8조 | 회원가입의 승인 |
| 제9조 | 비밀유지 | ||
❍ 입력하여야 할 사항인 관세사무소명은 띄어쓰기에 유의하여야 하며, 관세사현황, 지회회비청구현황, 지회회비납부현황과 일치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 회원가입(등록)하여 관리책임자의 승인을 받아야만이 회원전용 메뉴에서 인천지회 회칙 등 각종 규정, 회원공지사항(공문시달내용), 지회회비청구현황, 지회회비납부현황을 열람·출력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출처〕 1. 인천지회 25-19호(2025.09.30)
<홈페이지(회비영수증츨력시스템포함) 제작 완료 보고(통보)>
2. 인천지회 25-29호(2025.11.04.)
<인천지방관세사회 홈페이지 운영규정 제정 보고(통보)>
VII. 도쿄통관업연합회 인천세관 통관검사센타 방문
❑ 한국관세사회(회장 정재열)는 2025.3.25일(화)부터 27일(목)까지 일본 교토에서 개최된 국제관세사회연맹(IFCBA, 1990년 창립) 교토 세계 컨퍼런스에 참가하였다. 이번 행사에는 전 세계 20개국에서 200여 명의 통관 전문가 및 무역 관계자 등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는 한국관세사회 정재열 회장을 비롯한 9명의 대표단이 참석해 국제적인 교류를 진행하였다.
❍ 한국과 일본 대표단은 ‘AI 시대에서 관세사의 역할 변화’, ‘디지털화 및 데이터 활용을 통한 무역 효율성’등 큰 의의를 가지는 주제로 발표하였으며, 컨퍼런스 기간 중인 3월 25일(화)에는 한국관세사회와 일본통관업연합회가 양국 간 파트너십과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였다.
❍ 양해각서는 양 기관이 관세 행정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공동의 인식을 바탕으로, 상호 요청 시 관세 관련 정보 교환 및 협력 증진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으며, 정재열 회장은 “한국관세사회가 이번 컨퍼런스 참가와 MOU 체결을 통해 국제 사회와의 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수출·입 통관 환경 개선 및 무역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2025.10.30일에는 도쿄통관업연합회(TCBA) 통관사 13명이 서울지방관세사회 소속 관세사 8명과 같이 통관심사 및 검사절차 등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 다음 날인 2025.10.31일에는 인천지방관세사회 소속 관세사 6명과 같이 「인천세관 통합검사센타」를 방문하여 지정장치장의 수입화물 X-ray 검색과정, 관리대상 물품 식별절차, 통관 전후의 물류흐름 등에 대한 한국통관시스템에 대하여 인천세관 직원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으며 ,인천세관 직원이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는 등 현장에서의 일문일답방식으로 생동감 있게 진행하였으며, 일본 방문단 통관사 13명에게 마약탐지견 인형을 선물하였다.

❑ 2005.10.31.(금) 14:00-16:00까지 도쿄통관업연합회(TCBA : Tokyo Customs Broker Association), 인천지방관세사회 (INCCAA : Incheon Cetified Customs Attorneys Association) , 한국관세사회(KRCAA : Korea Cetified Customs Attorneys Association)가 참여하였다.
❍ 도쿄통관업연합회(TCBA) 방문단은 일본으로 돌아간 후, 한국관세사회장에게 전달한 감사메일에서 인천지방관세사회에서 설치한 준비된 환영 현수막을 보고 감동하였고, 인천세관직원들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화물검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여 주어서, 안전과 보안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하였으며, 방문 전에 인천지방관세사회장이 일본 통역사를 통한 직접 전화통화로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고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 마약탐지견인형 선물에 대하여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랫동안 간직하겠다고 하였으며, 인천지방관세사회와 도쿄통관업연합회의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이 기반이 되어서 앞으로 효율적인 통관절차 개선 등이 이루어질 것이며, 지난 3월 교토에서 개최된 국제관세사연맹(IFCBA) 세계컨퍼런스에서 일본통관업연합회가 한국관세사회 회원들을 환영해 주어서 감사 드린다는 인천지방관세사회 회장의 환영사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 도쿄통관업연합회(TCBA) 방문단이 「인천세관 통관검사센타」를 방문하여 감동한 것은 인천세관에서 검사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직원 및 일본어 통역을 할 수 있는 직원을 지원해 주었고, 마약탐지견인형 등을 제공하여 주었으며 인천지방관세사회가 사전에 작성한 시나리오에 의하여 원활하게 진행되어서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 차담회, 기념촬영, 선물 증정(마약탐지견 인형)으로 한국관세사회(인천지방관세사회)와 일본통관업연합회(도쿄통관업연합회)의 상호정보교환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친밀감을 도모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인천세관과 인천지방관세사회의 적극적인 업무협조체제 구축으로 신속· 정확한 수출·입 통관업무가 수행되고 민원발생사항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방안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감사편지내용 | 진행시나리오 내용 |
|---|---|
| · 준비된 환영 현수막을 보고 감동하였음 | · 현수막을 설치하였고 현수막을 가리키면서 환영인사 |
| · 세관직원들로부터 한국어와 일본어로 자세한 설명 | · 세관직원(검사과정설명,통역담당을 소개하고 검사과정 설명) |
| · 철저한 화물검사를 통한 안전과 보안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하였음 |
· 지정장치장의 출입문을 Free Pass 시키지 않고 관세무역개발원 직원의
인식카드를 접촉하여 한 사람씩 통과시킴(지하철 출입문 참고) · 화물의 하역현장, 엑스레이검색대,검사구역 에서 화물검사 과정 설명
|
| · 방문전에 일본통역사를 통한 직접 통화로 세심한 배려를 하여 주었음 |
· 일본인 통역사(여성,카와이마이)에게 진행 과정을 설명
· 마약탐지견 인형 전달할 때 일본 대표가 인사말 할 수 있도록 사전준비 설명
|
| · 마약탐지견인형 선물에 대하여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 간직할 것임 | · 마약탐지견인형을 도쿄통관업연합회 전 회원에게 보여주고 나서 인천지방관세사회 관세사가 개별적으로 직접 전달 |
| · 인천지방관세사회와 도쿄통관업연합회의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이 기반이 되어서 효율적인 통관절차 개선이 이루어 질 것임 |
· 정보교류와 협력강화를 위하여 상호간 협조체제 구축 약속 |
| · 지난 3월 교토에서 개최된 국제관세사회연맹 세계컨퍼런스의 MOU 체결에 대하여 과분한 말씀을 주신것에 대하여 감사함 |
· 인천지방관세사회장이 환영사에서 한국관세사회 회원을 도쿄에서 환대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하였음 |
❑ 도쿄통관업연합회의 「인천세관 통관검사센타」방문은 인천세관과 인천지방관세사회의 원활한 협조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 협 조 내 용 | 지 원 사 항 |
|---|---|
| 일본어 통역지원 | 통관검사2과장 박정우, 주무관 이은비 |
| 관리대상화물에 대한 설명 | 통관검사1과장 김재석, 주무관 전유경 |
| 마약탐지견 인형 제공 | 수출입물류과장 이근영, 주무관 이주연 |
| 현수막 제작 협조 | 세관운영과장 이연우, 주무관 최태영 |
| 진행사항 업무협의 | 감사담당관 이승희 |

| 인천지방관세사회 | 지 원 사 항 |
|---|---|
| 회 장 | 조규생 (해인관세사무소) |
| 부 회 장 | 이동우(SL관세사무소) |
| 운영위원 | 서옥봉(에프앤비관세사무소) |
| 고재언(세신관세사무소) | |
| 신승우(원스탑관세법인) | |
| 고충처리위원 | 김재석(지금관세사무소) |
| 사진촬영 | 한국관세사회(정은경), 인천지방관세사회(김민지) |
| 다과준비 | 인천지방관세사회(서옥봉, 김민지) |
❑ 한국관세사회 회무브리핑(2025.11.04.)의 ‘지회/회원 동정’에서 <도쿄통관업연합회 (TCBA), 서울지회(10.30.) 및 인천지회(10.31.) 방문 간담회>라는 제목으로 전 회원에게 홍보하였다.
❑ 이 홈페이지의 소식터(인천항의 소식)에 ‘관우 우리들의 이야기(도쿄통관업연합회 「인천세관 통관검사센타」방문, 삶은 예술이다 Vol 511(2025 Nov /Dec)’라는 제목으로 관세청
(세관) 직원에게 관우(關友)지에 홍보 하였다
〔출처〕 1. 인천지회 25-28호(2025.11.03.)
<인천항 세관물류CENTER 방문결과 보고(통보)>
2. 인천지회 25-30호(2025.11.12.)
<도쿄통관업연합회(TCBA) 감사편지 보고(통보)>